괜찮다고 말했지만, 괜찮지 않았던 날

“괜찮습니다.”

돌이켜보면 나는 이 말을 참 자주 했습니다.

거래처에서 예상하지 못한 연락이 왔을 때도, 회사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한꺼번에 쌓였을 때도, 직원이 조심스럽게 내 표정을 살피며 괜찮으냐고 물었을 때도 나는 습관처럼 괜찮다고 대답했습니다.

집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루 종일 회사 일에 시달리고 돌아온 날, 가족이 오늘 하루는 어땠느냐고 물으면 “괜찮았어”라고 짧게 답했습니다.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고, 회사에서 있었던 복잡한 일을 집에까지 가져오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괜찮지 않은 날이 더 많았습니다.

머릿속에서는 아직 끝나지 않은 일들이 계속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거래처에 어떤 답을 해야 할지, 직원들에게는 어떤 방향을 제시해야 할지, 내가 내린 결정이 정말 옳은 것이었는지 생각하다 보면 몸은 집에 와 있어도 마음은 여전히 회사에 남아 있었습니다.

대표라는 자리에 있다 보면 쉽게 힘들다는 말을 꺼내지 못합니다.

내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 직원들도 불안해질 것 같았습니다. 내가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면 회사 전체가 방향을 잃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잘 모르겠을 때도 아는 척해야 했고, 두려울 때도 태연한 표정을 지어야 했습니다.

대표라면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장으로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가족에게 든든한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아빠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고, 내 걱정이 가족의 걱정이 되는 것도 싫었습니다. 내가 조금 더 참으면 집안은 평온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회사에서는 대표의 얼굴을 하고, 집에서는 가장의 얼굴을 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서 내 얼굴로 살아가고 있을까.’

누군가를 책임진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감정을 삼키는 일이었습니다. 화가 나도 감정을 먼저 드러낼 수 없고, 두려워도 결정을 미룰 수 없었습니다. 지쳐도 다음 날이면 다시 출근해야 했고, 마음이 복잡해도 직원들에게는 분명한 방향을 이야기해야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괜찮다는 말을 방패처럼 사용했습니다.

괜찮다고 말하면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됐습니다. 누군가 내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보려 하지 않을 것이고, 나 역시 애써 감춰둔 감정을 꺼내지 않아도 됐습니다.

그런데 괜찮다는 말을 반복한다고 해서 정말 괜찮아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삼킨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마음 한쪽에 조금씩 쌓이다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별것 아닌 말에 예민해지기도 했고, 평소라면 그냥 넘어갔을 일에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가족이 건넨 평범한 질문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그제야 알았습니다.

그날 화가 난 이유는 눈앞의 작은 일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오래전부터 쌓아둔 피로와 걱정, 책임감과 두려움이 한꺼번에 밀려나온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은 퇴근 후 차 안에서 한동안 내리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었던 적도 있습니다.

집에 들어가면 가족을 반갑게 맞아야 하는데, 그날만큼은 웃을 힘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회사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잠시라도 아무 역할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대표도 아니고, 가장도 아니고, 누군가의 아빠나 남편도 아닌 채로 잠시 그냥 나 자신으로 있고 싶었습니다.

차 안의 조용한 시간이 끝난 뒤 집으로 들어갔고, 그날도 나는 괜찮은 사람처럼 행동했습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이런 질문이 계속 남았습니다.

‘나는 정말 괜찮은 걸까.’

예전에는 힘들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약한 모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누군가를 책임져야 하는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잘 다스려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물론 감정을 그대로 쏟아내는 것이 좋은 방법은 아닐 것입니다. 대표라는 이유로 직원들에게 불안과 짜증을 떠넘겨서도 안 되고, 가장이라는 이유로 가족에게 내 무게를 모두 나누어 지라고 요구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감정을 다스리는 것과 감정을 없는 것처럼 숨기는 것은 다른 일이었습니다.

“오늘은 조금 힘들었습니다.”

“아직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내가 무책임한 대표가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족에게 오늘 하루가 힘들었다고 이야기한다고 해서 부족한 가장이 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괜찮지 않은 나를 인정해야 무엇이 나를 힘들게 하는지 제대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무엇을 혼자 감당해야 하고, 무엇을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는지도 조금씩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요즘도 나는 종종 괜찮다고 말합니다.

다만 예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 말을 하기 전에 내 마음에 한 번 물어보려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괜찮은가?’

괜찮지 않다면 그 사실만큼은 나 자신에게 숨기지 않으려고 합니다. 당장 누군가에게 모두 털어놓지 못하더라도, 오늘 내가 지쳤다는 것을 인정해 줍니다. 잠시 멈추거나 조용히 생각할 시간을 가지기도 하고, 때로는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조심스럽게 마음을 꺼내놓기도 합니다.

늘 단단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단단한 사람이란 절대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필요할 때 잠시 기대고, 다시 일어날 줄 아는 사람이 진짜 강한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시 오늘도 누군가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나는 괜찮아”라고 말하셨나요?

대표이기 때문에, 가장이기 때문에, 부모이기 때문에 또는 누군가에게 든든한 사람으로 남고 싶어서 자신의 마음을 삼키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이 글을 읽는 당신이라면, 괜찮지 않은 날에 누구에게 가장 먼저 마음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누구에게도 말하기 어렵다면,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만큼은 이렇게 말해 주면 어떨까요.

“오늘은 사실 조금 힘들었어.”

괜찮지 않은 날이 있다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잠시 괜찮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 해우소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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